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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尺誓天山河動色(삼척서천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일휘소탕혈염산하)
세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의 색이 변하는 도다.
한바탕 휘둘러 쓸어버리니 산하가 피로 물드는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장검이다.
위의 글귀는 검신에 새겨져 있는 내용임.
임진왜란 발발과 조선의 위기 (1592년)
'삼척서천 산하동색'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장검은 15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의 시점입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일본의 침략 야욕: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대륙 침략이라는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략합니다. 그는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를 요구했으나 조선이 거절하자 1592년(선조 25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 조선의 준비 부족: 200년 가까이 큰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했던 조선은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백년 전쟁을 통해 단련된 정예병을 앞세워 침략 초기 파죽지세로 북상했습니다.
- 육군의 연이은 패배: 조선 육군은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한양까지 순식간에 함락당했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는 등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활약과 고뇌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에서 수군을 재건하고 연전연승을 거두며 조선의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 조선 수군의 유일한 희망: 육군이 연전연패하는 동안,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부터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 등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일본 수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1592년 7월의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일본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좌절시키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 고립무원의 상황: 비록 해상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육지에서는 여전히 전황이 불리했고, 이순신 장군 개인적으로는 중앙 조정의 시기와 모함에 시달리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당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는 등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다시 전장으로 복귀했습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의 의미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삼척서천 산하동색'은 단순한 용맹함을 넘어선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각오와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 절대적 위기감: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이순신은 자신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 목숨을 건 결의: 자신에게 주어진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고, 산과 강을 떨게 할 정도의 강한 힘으로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결의는, 죽음을 각오하고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안위나 영달을 넘어선 구국의 일념을 보여줍니다.
- 고독한 싸움: 조정의 불신과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그는 고독하게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결의는 외부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는 내면의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요약하자면, '삼척서천 산하동색'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존망의 위기, 육지의 패배와 수군의 고독한 분투, 그리고 이순신 개인의 좌절과 고난 속에서 발현된, 하늘에 맹세하고 기필코 적을 섬멸하겠다는 비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한 무인의 기개가 아닌,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려 했던 한 위대한 인물의 절규이자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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