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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 반대 시위

진02Jin02 2025. 5. 2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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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 반대 시위'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민주화운동 중 하나로, 1969년 박정희 정권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저항 운동을 말합니다.

 

1. 배경 및 경과

  • 박정희의 장기집권 의지: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2선 연임 제한 규정(헌법상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음)에 따라 1971년 임기가 끝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장기집권 의지를 굳히며 3선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 부정선거를 통한 의석 확보: 이미 1967년 6월 8일 총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관권과 금권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헌법 개정선(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을 넘는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이는 3선 개헌의 사전 포석이었습니다.
  • 안보 위기론 활용: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 1.23 푸에블로호 사건 등 안보 위기가 연속적으로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국내 통제력 강화와 3선 개헌의 명분으로 활용했습니다.
  • 여당 내 반대 세력 제거: 박정희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 중 일부는 3선 개헌에 반대했으나, '국민복지회 사건'(1968년)과 '4·8항명파동'(1969년) 등을 통해 공화당 내 반대 세력이 제거되었습니다.
  • 개헌안 발의 및 날치기 통과: 1969년 7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개헌에 관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며 자신의 3선 개헌 의지를 공식화했습니다. 이후 1969년 9월 14일, 여당은 일요일 새벽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당 의원들의 저항을 피해 날치기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2. 반대 시위의 전개 및 주체

3선 개헌 반대 시위는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 주요 주체:
    • 야당: 신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은 3선 개헌이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유진오, 윤보선,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 야당의 주요 인사들이 반대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학생: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전국 각 대학의 학생들이 3선 개헌 반대 시위의 선봉에 섰습니다. 시위는 개헌안 통과 이전부터 시작되어, 9월 14일 날치기 통과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학교는 휴교령을 내리며 시위를 진압하려 했으나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고교생들까지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 재야인사 및 종교계: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 해금인사와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들이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기하여 연대 투쟁을 벌였습니다. 김재준, 함석헌, 장준하 등이 참여했습니다.
  • 주요 활동:
    • 대학 내 집회 및 가두시위
    • 야당의 지방 시국 강연회
    • 시민단체의 성토대회 및 기자회견
    • 공동 선언문 발표 (예: '제3선언문' 등)

3. 주요 주장과 논리

3선 개헌 반대 운동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독재와 영구집권 저지: 3선 개헌은 민주헌정의 파괴이자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위한 음모이며, 이는 곧 민주주의의 사망 선고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 민주주의 수호: 헌법이 정한 대통령 중임 제한 원칙을 훼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 정당성 결여: 1967년 총선거의 부정성, 날치기 통과 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3선 개헌의 절차적 정당성이 없음을 비판했습니다.
  • 국민적 합의 부재: 특정 개인의 장기 집권을 위해 국민적 합의 없이 추진되는 개헌에 반대했습니다.

4. 결과 및 영향

결국 3선 개헌안은 1969년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습니다. (투표율은 77.1%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대대적인 자금 살포와 관권 개입을 통해 개헌 찬성을 유도했습니다.

  • 개헌안 통과: 3선 개헌은 물리적인 힘과 관권 동원 속에 통과되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김대중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습니다.
  • 민주화 운동의 성장: 비록 3선 개헌 저지에는 실패했지만, 3선 개헌 반대 운동은 학생운동의 이념을 확장시키고 반독재 재야운동이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과 같은 더 큰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정치적 불안정 심화: 3선 개헌 강행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독재 강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19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를 열게 됩니다.

3선 개헌 반대 시위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시민들이 헌법 수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중요한 저항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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